2004년 5월 30일 일요일

Gardner Dozois ed., The Good Old Stuff : Adventure SF in the Grand Tradition

ISBN: 0312192754


최근 다양한 현대 SF가 많이 번역되었지만, 예전 아이디어 회관 문고나 SF만화를 읽으면서 자란 많은 한국의 SF독자들에게는 우주활극, 즉 스페이스 오페라가 가장 친숙한 서브장르일 것이다. 어린시절 즐겁게 읽던 모험담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시모프지의 편집장 가드너 도조와(Gardner Dozois)가 그 답으로 1940년대부터 70년대 사이에 발표된 모험담을 모아 내놓은 단편선이 바로 The Good Old Stuff이다. 도조와는 서문에서 향수를 느끼기 위한 한물 간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의 독자들도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모으고자 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도조와가 편집하는 대부분의 걸작선에서와 마찬가지로 훌륭히 성공했다.

쓰레기가 아니라 즐거운 고전으로 남은, 반 보그트(A.E. van Vogt), 디캠프 (L. Sprague de Camp), 반스(Jack Vance), 앤더슨(Poul Anderson), 스미스(Cordwainer Smith), 젤라즈니(Roger Zelazny)같은 낯익은 작가들의 흥미진진한 모험! 우주선을 타고 외계인과 만나고 적을 무찌른다. 목적에 충실하고 제목 그대로의 내용을 담아 자세한 줄거리 소개가 별로 필요없는 단편선이다.

모험담을 좋아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구입하길.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서브장르를 대표하는 책을 한 권만 산다면 바로 이 단편선을 골라도 좋다고 생각한다. 평소 펄프시대 활극을 전혀 즐기지 않는 나에게도 만족스러웠을만큼 잘 꾸며졌고, 펄프시대를 재조명하는 도조와의 애정어린 서문도 꼭 읽어볼 만 하다.

이 책의 짝꿍으로 70년대 이후에 발표된 스페이스 오페라를 모은 The Good New Stuff가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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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29일 토요일

Peter Crowther ed., Mars Probes

ISBN: 0756400880


Mars Probes는 제목과 표지에서 단번에 알 수 있듯이 화성을 소재로 한 단편을 모은 책이다. 편집을 맡은 Peter Crowther는 대단히 멋진 책을 만드는 영국의 소형출판사 PS Publishing를 만든 작가이자 출판인으로, 평소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 DAW의 페이퍼백 단편선인 이 책을 집어든 것도 그가 PS Publishing에서 보여주는 기획력과 선별력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이 책은 '화성'을 소재로 하고 있을 뿐, 대부분 하드 SF와는 거리가 멀다. 첫머리에 등장하는 브레드버리의 The Love Affair는 화성연대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신작이다. 조그만 화성인들이 지구를 전쟁터로 쓴다는 풍자소설 The War of the Worldviews, 이미 다른 단편선에도 여러번 실리며 호평받았던 이안 맥도널드의 The Old Cosmonaut and the Construction Worker Dream of Mars 등 다양한 느낌의 단편이 하나의 소재를 중심으로 꽤 잘 갈무려졌다. 무너진 가족간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다룬 스콧 이델만의 Mom, the Martians, and Me가 가장 인상깊었고, 역사의 진실을 알릴 듯이 거창하게 시작하여 별볼일 없는 가십으로 끝난 대체역사 A Walk Across Mars가 가장 실망스러웠다.

만원 남짓한 책값이 아깝지 않은 잘 짜여진 단편선이다. 화성에 특별히 관심이 없더라도 과학소설 독자라면 누구나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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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26일 수요일

Jonathan Carroll, Bones of the Moon

ISBN: 0312873123


조너선 캐롤(Jonathan Carroll)의 책은 소개하기 어렵다. 발간 순서대로 다루어 보겠다는 생각으로 The Land of Laughs부터 시작했지만 대체 뭐라고 써야할지 난감하다. 조금만 길게 쓴다 싶으면 스포일러같고, '꼭 읽으세염 ㅋㅋ '이라고 쓰고 넘어가려니 설득력이 없고, 아예 안 쓰려니 재미있는 책이라 아쉽고.

Bones of the Moon(1987)은 Sleeping in Flame(1988)과 함께 내가 가장 자주 추천하는 캐롤의 소설이다. 화자 컬린 제임스(Cullen James)는 어려운 일을 겪은 후 대학 시절부터 친구였던 남편 대니(Danny)와 결혼하여 유럽으로 떠난다. 조용하고 행복하게 지내며 안정을 찾은 컬린은 어느날부터 이어지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론다(Rondua)라는 환상의 세계에서 펩시(Pepsi)라는 아이와 함께 달의 뼈 다섯 개를 찾는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단순히 호르몬 변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꿈은 점점 더 자주 나타나더니 서서히 현실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는 사이 제임스 부부는 미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그 뒤로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지만 직접 읽을 사람의 재미를 위해 생략한다. 뒤에 발표된 Sleeping in Flame, A Child Across the Sky ㅡ 이 세 작품을 묶어 Rondua Trilogy라고도 한다 ㅡ 와 느슨하게 이어져 겹치는 등장 인물을 발견하는 것도 즐겁다.

먼저 소개했던 The Land of Laughs가 공포소설의 색채를 띠고 있는 데 비해 이 Bones of the Moon은 별로 무섭지 않다. 컬린의 생활(현실)과 여정(꿈)을 따라가는 과정은 즐겁고, 어쩔 수 없는 상실은 더 큰 용기와 사랑과 희망으로 보답받는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심해지는 캐롤의 '갑자기 멋대로 이야기 끝내버리기'도 없다. 전통적인 퀘스트물(?)과 어번판타지(?)를 캐롤만의 독특한 글솜씨로 섞은, 어느 전형에도 끼워맞추기 힘든 감동적인 환상소설이다. 강력추천.

2004년 5월 25일 화요일

Orson Scott Card ed., Future On Ice


단편선(anthology)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한 해의 수작을 모은 책도 있고, 시대별로 구분한 책도 있으며, 특정한 소재나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관련 작품을 모은 책도 더러 나온다. 이런 단편선은 여러 작가의 글을 한 책에서 볼 수 있다는 점 뿐 아니라, 편집자가 어떤 기준하에 작품을 추려 해석했는지를 통해 같은 글을 다른 시각에서 재발견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따라서 단편선은 편집자의 작품을 고르는 눈과 골라낸 글을 엮어 독자에게 일관성 있게 드러내는 솜씨에 따라 수준이 갈린다. 좋은 작품이 많이 실린 걸작선이라도 제대로 갈무려지지 않았다면 그저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이름난 단편을 거듭 찍어낸 종이더미에 불과하다.

Future On Ice는 바로 이 '갈무림'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안타까운 단편선이다. 재미는 있다. 올슨 스콧 카드의 소개글도 읽을 만 하고, 수록작도 그럭저럭 수긍이 가는 작품들이다. 문제는 올슨 스콧 카드가 이 단편뭉치로 대체 뭘 하고 싶었는지가 도통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그래도 제목이 Future On Ice인데 다루고 싶었던 것이 얼음처럼 차가운 인간사인지, 빙하기의 인류인지, 지구멸망인지, 그냥 눈 오는 날인지 이렇게 감이 안 잡혀서야. 누구나 '좋은 책 읽었다'고 말하며 책을 덮을법한 지극히 '안전한' 글을 모았기 때문에 혹평하기도 어렵다. 읽은 후 한참이 지나 되짚어 보면 '그런데 OSC는 한 게 뭐냐'싶어진다. 소개글 몇 장으로 제목만큼 커다랗게 찍힌 이름값을 했다고 보기는 무리다. 좋은 단편이야 개별 작가들이 쓴 것이고, 숨겨진 보석을 발굴했다고 칭송할만큼 도드라지는 선택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있으면 읽어도 후회없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그만인 책이다.

본래 이 단편선은 Future On Fire(1991)라는 단편선의 후속작이다. Future On Fire는 내가 Future On Ice를 샀을 때 이미 절판이었기 때문에 아직껏 읽어보지 못했다. (솔직히 별로 구해보려 애쓰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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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24일 월요일

[그냥] 하드커버 껍질싸는 법

더 좋은 방법도 있겠지만, 내 방법도 참고삼아.......

1. 더스트재킷(dustjacket)이 있는 책


(1) 책포장 비닐(문구점에 가면 파는 얇은 아스테이지)을 펼친 더스트재킷보다 가로는 조금 짧고 세로는 길게 자른다.


(2) 세로 여분을 안쪽으로 접는다. 가위 손잡이 등으로 문질러 자리를 잡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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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Analog Science Fiction and Fact

잡지는 영어권 국가, 특히 미국에서 과학소설과 판타지 단편이 독자와 만나는 중요한 통로이다. 각 잡지는 편집자의 취향과 잡지 자체의 역사에 따라 싣는 작품의 종류와 분위기가 제법 다르기 때문에, 어느 잡지에 실렸는지만으로도 그 소설이 어떤 글일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앞으로 리뷰를 올릴 각 잡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본다.

Analog Science Fiction and Fact(이하 '아날로그')는 과학소설을 지금과 같은 하나의 장르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던 유명한 편집자 캠벨(John W. Campbell)이 만든 잡지로 전신은 Astounding이다. 캠벨은 '과학'과 '소설'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작가들을 몰아붙여 과학소설을 괴물이 난무하는 황당한 싸구려에서 '말이 되는 이야기'로 바꾸며 과학소설의 황금시대(The Golden Age)를 열었다. 캠벨은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글을 써내지 않는 작가는 가차없이 외면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과정에서 발굴되어 지금껏 이름을 남긴 대표적인 작가가 바로 아시모프(Issac Asimov), 하인라인(Robert A. Heinlein), 앤더슨(Poul Anderson), 스터전(Theodore Sturgeon)등이다. 참고로 소위 캠벨리언 SF(Campbellian SF)라고까지 불린 이 스파르타식 과학소설 쓰기에 대한 반발은 사이버펑크나 뉴웨이브 같은 60년대 이후의 변화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캠벨이 펄프잡지 어스타운딩을 맡은 것이 37년. 그 사이 과학소설은 캠벨리안 SF를 넘어 뉴웨이브, 사이버펑크, 페미니즘 SF 등으로 그 경계를 확장하며 '말이 되는 이야기'를 넘어 '세상을 보는 하나의 독립된 문학적 시선'으로 자신을 재정립하려 분투해 왔다. 캠벨의 방식은 이제 과학소설을 틀 안에 가두어 문학으로서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한 원인으로 비판받는다.

하지만 최종 공과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캠벨이 과학소설사에 미친 영향은 지울 수 없고, 그 영향력은 '존 캠벨 기념상'이라는 문학상과 아직도 '과학소설'이라는 길을 분명히 가고 있는 잡지 아날로그에 선명히 살아 숨쉰다. 네뷸러를 수상한 작가 출신인 가드너 도조와(Garnder Dozois)가 이십 년 가까이 맡은 아시모프지(Asimov's Science Fiction)나 직업적 출판인인 고든 반 겔더(Gorden Van Gelder)가 꾸리는 FSF(The Magazine of Fantasy and Science Fiction)와 달리 물리학 박사인 스탠리 슈미트(Stanley Schmidt)가 편집을 맡고 있다는 것 부터가 ㅡ 그 전에는 NASA가 생기기도 전부터 미국의 우주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학자 벤 보바(Ben Bova)였다 ㅡ 아날로그의 지향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날로그에 주로 실리는 작품의 성격을 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과학적 아이디어'이다. 인물? 성격? 전혀 없다면 지나친 혹평이겠지만 아날로그의 데스크는 그 쪽에 상대적으로 무게를 덜 주고 있음이 분명하다. 내 주관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아날로그는 정치적으로도 조금 수상하다.(하인라인을 떠올려 보라!) 하지만 대신 아날로그에서는 기발한 과학적 아이디어, 혹은 진짜 하드한 하드 SF를 만날 수 있다. 아날로그에 주로 작품을 싣는 작가 중에는 물리학자, 천문학자 등 과학계 종사자가 유달리 많다. 표제의 Fact가 무색하지 않게 교양과학 칼럼도 꾸준히 실린다. 엔지니어가 아니면 전혀 웃기지 않을 꽁트도 잊을만 하면 하나씩 나온다.

과학소설과 일반문학과 환상소설이 하나가 되는 요즈음 아날로그는 구식 SF나 실으며 지나간 영광에 집착하는 잡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날로그에나 실릴 법한 글'이라는 빈정거림 뒤에는, 칠십 년 동안 굳혀온 나름의 자리가 있다. 그리고 그 '독자를 놀라게 하지 않는' 단단함은 개인의 취향이 어떻든 과학소설 독자라면 인정해야 할 가치이다.


아날로그에 대한 개인적인 주절

2004년 5월 22일 토요일

구입 : 2004년 5월 22일



Time Stops for No Mouse by Michael Hoeye
The Giver by Lois Lowry
천재 유교수의 생활 23, 야마시타 카즈미

Jonathan Carroll, The Land of Laughs

ISBN: 0312873115


1980년에 발표된 조너선 캐롤(Jonathan Carroll)의 데뷔장편.

토마스 애비(Thomas Abbey)는 학교 선생으로 시시한 삶을 살고 있다. 연애도 학교 일도 잘 안 풀리는데다 도무지 유명한 배우였던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그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어렸을 때부터 광적으로 좋아하던 작가 마셜 프랜스(Marchall France)에 대한 전기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어느 날 토마스는 고서점에서 마셜 프랜스의 희귀본을 우연히 발견하지만, 그만 먼저 책을 집어든 색소니 가드너(Saxony Gardner)에게 선수를 뺏기고 만다. 색소니가 삼십 오 달러에 책을 사자 토마스는 백 달러를 줄 테니 그 책을 자기에게 넘기라고 즉석에서 제안하고, 형편이 어려운 색소니는 책을 복사한 뒤 팔기로 약속한다. 그녀의 집에 간 토머스는 색소니가 자기처럼 마셜 프랜스의 열광적인 팬이라는 것을 알고는 충동적으로 연락처를 남긴다.

색소니가 정말 집에 찾아오자 토머스는 엉겁결에 계획중이던 전기에 대해 말한다. 정보를 찾는 일에 능한 색소니는 다른 사람도 아닌 마셜 프랜스에 대한 책이라는 말에 떨떠름해하는 토머스를 무시하고 끼어들어 정보를 찾기 시작한다. 마셜 프랜스의 책을 담당하는 에이전트가 작가의 딸 안나가 어떤 위인전이나 관련 도서도 쓰지 못하게 하며 대단히 비협조적이라고 경고하지만, 둘은 결국 함께 마셜 프랜스가 작품활동을 했으며 지금은 안나(Anna)가 살고 있는 Galen으로 떠난다.

직접 만난 안나는 뜻밖에도 전기 작성에 협조적이다. 집 구경도 시켜주고 자료도 편히 보도록 해 준다. 그러나 마음 놓고 지내는 것도 잠시, 둘은 창작의 터전인 시골 마을로만 보였던 동네가 실은 몹시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전거를 타던 아이가 죽은 것을 시작으로 이상한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마을 사람들도 알면 알수록 이상하기만 하다.

데뷔작임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멀끔한 환상소설이다. 보통 후기작을 읽은 후 초기작을 읽으면 부족한 부분이 눈에 띄기 마련이나 캐롤의 데뷔작은 원작년도를 모르면 첫 작품임을 깨닫지 못할 만큼 매끈하다. Tor ORB에서 새로 낸 페이퍼백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캐롤의 작품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데뷔작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책 밖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독자를 안개처럼 둘러싸는 환상성이 무서울만큼 교묘하고 매력적이라 ㅡ 정말 흥미진진하다 ㅡ 일단 한 권을 읽고 나면 나머지 책은 절로 찾게 될 테니, 최근 TOR에서 캐롤의 소설을 트레이드판으로 재간하고 있다는 것도 이 참에 써 둔다.

2004년 5월 21일 금요일

Tony Daniel, The Robot's Twilight Companion

ISBN: 0965590151


내가 토니 다니엘의 단편을 처음 접한 것은 도조와의 The Year's Best Science Fiction 시리즈를 통해서였다. 젤라즈니를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단편 A Dry, Quite War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나는 처음 알게 된 작가의 단편집을 단숨에 주문하여 받자마자 펼쳐들었다.

첫 번째 작품 Life on the Moon은 시인과 건축가(?)의 사랑을 다룬 감동적이고 조금은 슬픈 이야기로, 시공간의 끝에서 전쟁을 치르고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이 등장하는 A Dry, Quite War과 느낌이 비슷하다. 세 번째 수록작 Radio Praha도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훌륭한 단편으로, 앞 두 편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한 점이 의아스럽다. 나는 여기까지 읽은 후 이 세 편 만으로도 이 책은 제 값을 하고 넘친다고 생각했다. 뒤에서 두 번째에 실린 Grist는 장편 Metaplanetary(Tor,2001)의 앞 부분에 포함되었으나 독립된 하나의 이야기로서도 충분한 감동을 불러온다. 솔직히 말하면 Metaplanetary보다 따로 떼어낸 Grist가 훨씬 인상적이었다.(Metaplanetary에 대해서는 이번 달에 나온 후속편 Superluminal을 읽은 후 묶어서 몇 자 써 보겠다.)

마지막 작품인 The Robot's Twilight Compaion는 대호평을 받은 중편이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잘 읽히지 않았다. 희미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Aconcagua, Black Canoes에서도 고개를 갸웃했으나, 글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ㅡ 오히려 이미지는 대단히 충격적이다 ㅡ 단순히 내 취향과 조금 어긋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Life on the MoonA Dry, Quiet War은 온라인에서 읽을 수 있다. 이 두 편이 마음에 든다면 단편집에 투자(!)해 보자. Radio Praha는 처음 발표된 아시모프지를 제외하면 거듭 실린 적이 없다.

로저 젤라즈니, 스타니스와프 렘, 루셔스 셰퍼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특히 잘 맞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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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rey Ford, The Portrait of Mrs.Charbuque

ISBN: 0060936177


이탈리아 이민자인 할아버지와 무기 제조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화가 피암보(Piambo)는 부자들의 마음에 쏙 드는 초상화를 그리는 일로 재능을 낭비하[고 돈을 벌]며 살아가고 있다. 불행한 결혼 생활에 시달리는 부인을 부유한 의뢰인 남편이 바라는 이상형에 가깝게 그려준 날, 축하 파티에서 그는 평생 남편이 바라던 모습인 초상화와 실제의 사랑 없는 결혼 사이에서 시달려야 할 부인으로부터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술에 절어 파티장을 뛰어나오고 만다.

그 때, 피암보에게 앞 못 보는 노인이 시허연 눈을 희번득거리며 다가와 성공하기만 하면 엄청난 대가를 얻을 일이 있다고 제안한다. 자기가 모시는 셰르부끄 부인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조건이 이상하기 그지없다. 부인의 얼굴을 보지 않고 이야기만 나누어 실물과 꼭 같이 그려내야 한단다. 피암보는 이번 일만 성공하면 부유층 언저리에서 쓸모없는 초상화나 그리는 생활을 접고 원하는 그림을 그릴 경제적 여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제안에 응한다.

처음에는 부자의 변덕 정도로 생각했던 일은 점점 깊고 복잡해지고 어린 시절의 기억, 화가 친구들 사이의 비밀, 살인 사건 등이 얽히며 피암보는 더 이상 발을 뺄 수 없을 만큼 상황에 붙잡혀 버리고 만다.그리고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에서 일상처럼 펼쳐지는 환상은 피암보 뿐 아니라 독자도 붙잡아 끌어들인다. 과연 피암보는 초상화를 그릴 수 있을까? 셰르부끄 부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살인자는 누구이며 그 뒤에는 누가 있을까?

포드는 자연스럽게 끄집어낸 이야기를 그만큼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마무리한다. 깔끔하고 영리하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긴장감과 책을 덮은 순간 밀려드는 충족감은, 독자에게 그가 그저 '읽히는 글쟁이'에 그치지 않고 '기억되는 예술가'로 올라서리라는 믿음을 남긴다.

Thomas M. Disch, The Genocides

ISBN: 0375705465


내가 처음 읽은 디쉬의 장편은 Camp Concentration이었다. 이 소설은 지적 능력을 몇 배로 증가시키는 대신 수명을 10개월 정도로 단축케 하는 약물을 투여하고 그 결과를 지켜보는 연구(과연?)를 하는 '캠프 아르키메데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그 지적인 현란함과 긴장감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결말이라니!

디쉬의 글은 읽기에 쉽지 않다. 독자의 정신을 쏙 빼놓는달까. 친절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아름다움. '이봐, 넌 아무것도 아냐.', '못 알아듣겠으면 네가 그만둬. 난 설명할 생각 없으니까.'라고 내뱉는 듯한 문장과 줄거리는, 그러나 동시에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이다.

단편 몇 작품을 거치고 집어든 The Genocide는 역시 대단했다. 처음 두어 페이지만에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숲. 어느날 갑자기 자라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식물(plant)들은 엄청난 속도로 인간의 세계를 잠식해 들어간다. 몇십미터의 길이에 꽃대처럼 부드러운 둥치를 가진 이 나무는 처음 발견된 지 7년여 만에 지구를 거의 뒤덮는다. 제일 먼저 자급자족이 힘든 도시들이 무너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부며 국가도 사라졌다. 대부분의 동식물은 멸종하고 강은 말라붙었다. 몇몇 농민들만이 끊임없이 식물을 제거하고 농토를 조금이라도 확보하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 사람들 중 하나가 타셀에 사는 앤더슨이다. 그는 자기 마을의 지도자로 식물에 맞서서 농토를 지키고, 늑대 ㅡ 진짜 늑대가 아니라, 농민과 달리 자급기반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도시출신민 ㅡ 들로부터 자기들의 자원과 사람을 보호한다. 독실한 신자인 앤더슨은 자신에게 노아(노아의 방주)의 사명이 주어졌다는 쪽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권력은 사실 그가 가진 총에서 나온다. 그는 그들 중 무기를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스포일러 있음(계속읽기)


디쉬는 번역이 너무 어렵고 소위 '눈물과 감동이 있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팔릴지도 짐작할 수 없어 국내에 소개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당장 과학소설 독자라면 디쉬를 적어도 한 권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부터도 번역하라면 절대 사양이니 말이다 (누구 다른 사람이 해 준다면 좋지). 빈티지(Vintage)에서 Camp Concentration, The Genocide, 334를 재간하여 구입이 가능하다. 너무 감동해서 감상을 쓸 수조차 없었던 성장소설 On Wings of Song은 아쉽게도 이미 절판이지만 ㅡ 어째서 이런 책이 절판일까! ㅡ, 온라인 헌책방 사이트에서 Bantam의 MMPB판이나 Carrol&Graf의 TPB판을 3달러(+우송료 7달러) 정도에 쉬이 구할 수 있다.

2004년 5월 20일 목요일

James Morrow, The City of Truth

ISBN: 0156180421


거짓의 시대가 끝난 후 세워진 진실의 도시(The City of Truth). 그 중심은 Veritas(진리)이다. 이제 사람들은 거짓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 ㅡ 말 그대로! 엘리베이터에는 '이 엘리베이터는 자기 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케첩에는 '토마토 맛을 낸 캐첩'이라고 쓰여 있다. 심지어 욕도 'Fuck you figuratively!'이다.

진실의 도시에 사는 아이들은 10살이 되면 burning이라는 일종의 성인식을 거친다.'돼지에게는 날개가 있다', '개는 말을 한다' 같은 거짓말을 읽도록 하고, 그 때마다 전기 충격을 주어 일종의 조건반사로 진실만을 말하는 법을 습득하게 하는 것이다.

이 도시에는 은유를 비롯한 어떤 거짓말도 없다. 주인공 잭 스페리(Jack Sperry)는 예술 비평가이자 일곱 살 난 아들을 둔 평범한 시민으로 매일 '토머스 무어 광장'을 지나 '비트겐슈타인 미술관'으로 출근하여 오즈의 마법사에서 거짓인 부분을 뜯어내고 천사 그림에서 날개를 지워 불태우는 일을 한다.

캠프에 간 아들이 덫에 걸린 토끼를 놓아주다 Xavier's Plague라는 치명적인 병에 걸린 다음부터 잭 스페리의 생활은 뒤엉키기 시작한다. 진실 뿐인 도시는 냉정하기 그지없다. 아내마저 아이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기정사실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자, 잭은 절망에 빠진 나머지 거짓 중의 거짓인 '기적'을 바란다. 아이에게 죽을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무도 말하지 않아 스스로 건강하다고 확신하게 하면 병도 나으리라는 절망적인 기대로. 하지만 결국은 평범한 베리타스 시민일 뿐인 잭이 거짓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거짓말 하는 법을 배워 아들에게 '괜찮아. 아무 것도 아니란다.'라고 말하기 위해 우연히 만났던 수상한 여자 마티나(Martina)를 따라 거짓말을 할 줄 아는'위선자(Dissembler)'들을 찾아나선다. 그리고 Veritas 지하에 있는 위선자들의 도시 Satirev(철자거꾸로)로 들어간다.

'웃을 일이 아닌데....'하면서도 낄낄거리게 만드는 저자(James Morrow)의 재치가 일품이다. 가볍고 행복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삶이 진실과 거짓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큰 사랑으로 엮어가는 과정이라는 믿음은 모든 풍자와 슬픔을 넘어 빛을 발한다.

160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소설이고 어렵지 않은데다 1993년 Harvest판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긴 원서가 부담스러운 독자에게도 권해 본다.

2004년 5월 19일 수요일

Martin Harry Greenberg ed., The Way It Wasn't

ISBN: 0806517697


마틴 그린버그가 편집한 이 책은 사실 꽤 '괜찮은' 앤솔로지이기는 하다. 작품이 실린 작가의 이름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듯이 대부분의 단편이 큰 실망 없이 읽을만 하고, 눈에 띄게 훌륭한 대체역사 소설도 몇 편 끼어 있다.

그러나 이 단편선의 대체 '역사'는 철저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다. 이런 책은 아무리 참신한 발상으로 쓰여졌다 해도 읽는 독자가 미국 역사를 잘 알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역사상 주요한 사건이 무엇이고 남북전쟁(The Civil War)의 전황이 어떠했으며 역대 대통령이 누구였는지 정도의 배경 지식이 있지 않으면 'what if...'라는 설정에 매료되기는 커녕 'so what?"이라는 애매한 물음만 남게 된다. 미국의 문화와 역사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터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대체역사소설에 각별히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오리지널 수록작이 많으니 책장에 한 권쯤 놓아둘 만 하나, 이도 저도 아니라면 미국 서점의 평균평점에 혹하지 말기를 권한다.

수록작 중 개인적으로 첫손에 꼽는 추천작은 'Suppose They Gave a Peace'이다. 72년 (미)대선 결과가 실제와 달랐고 베트남전이 격화되었다는 가정하에, 아들을 전장에 보낸 아버지의 심경 변화를 통해 전쟁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와 작은 희망을 보여준다. 저자의 단편집(2002) 표제작이고 웬만한 대체역사 단편선에는 다 실려 있어 구하기 어렵지 않다.

전체목차


참, 그리고 대체역사소설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특히 읽은 소설의 어떤 부분이 '대체'된 역사인지 잘 모르겠다면 이 사이트에 들러 찾아보길. 어느 시대 어느 사건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데이터베이스화 해 놓은 곳으로, 장편은 물론이고 중단편도 대부분 다루고 있어 대단히 유용하다.

2004년 5월 18일 화요일

Geoffrey A. Landis, Impact Parameter: And Other Quantum Realities

ISBN: 1930846061


제프리 A. 랜디스의 첫 번째 단편집이다. 골든그리폰(Golden Gryphon Press)에서 낸 책답게 밥 에글턴(Bob Eggleton)이 그린 표지, 제본, 종이 등등이 모두 훌륭하다. 워낙 잘 만들어져 책만 보아도 사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데, 그에 더해 실린 글의 수준도 만만찮다. 약간의 기복은 있지만 전편이 평균 이상의 수준을 자랑한다.

첫머리를 여는 A Walk in the Sun은 '태양 위를 걷다'는 제목으로 구 정크SF에 올라온 적이 있는 단편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주인공의 심리갈등과 달 위의 움직임과 풍광에 대한 섬세하고 정확한 묘사가 멋지게 어우러진 수작으로, 휴고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마법과 과학을 교묘하게 섞은 재기가 빛나는 Elemental, 작가 자신의 직장이기도 한 나사에 대한 귀여운 꽁트 What We Really Do Here at NASA, 짧지만 강렬한 Snow, 왓슨과 홈즈의 모험을 다룬 The Singular Habits of Wasps등 다양한 이야기가 작가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좀 더 전통적인(?) 하드 SF에 가까운 Impact Parameter,Across the Darkness 등도 놓쳐서는 안 되는 단편. 랜디스는 단순히 과학적 사실만을 늘어놓는 함정에 빠지지 않고 인물을 생생하게 살려내어, 모든 단편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사람 사는 얘기'를 담았다. 보통 한 작가의 단편집을 보면 쓰여진 시기에 따라 수준에 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랜디스는 그 기복이 눈에 띄게 작아 특별히 처지는 작품이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록작은 중편 Beneath the Stars of Winter이다. 구소련 정치범 캠프에 수감된 과학자들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차분하게, 그래서 더 간절하게 그려낸 이 중편을 나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었다. 그 수준과 감동에 마땅한 주목을 받지 못한 점 ㅡ 휴고 후보에 그쳤다 ㅡ 이 지금까지도 몹시 아쉽다.

하드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휴머니즘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절대 후회하지 않을 탁월한 단편집.

전체차례

2004년 5월 17일 월요일

Catherine Asaro ed., Irresistible Forces

ISBN: 0451211111


언젠가 무료한 저녁, 아마존에서 판타지/과학소설 리스트매니아 목록을 넘어다니며 읽을 만한 책을 고른 적이 있다. 당장 읽을 거리가 필요했던 터라 대충 훑어보고 재미있을 것 같으면 fictionwise,com에 가서 e-book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찾다 양쪽 검색에 다 잡히는 책이 한 권 나왔다. 줄거리를 보니 시대를 넘어 어쩌고 저쩌고란다. 시간여행, 좋지. 일단 샀다. 읽었다. 낭패스러웠다. 주인공이 점집에 가서 전생 이야기를 들은 후 최면요법을 통해 유체이탈하여 과거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가더니 샤바샤바해서 업보를 풀고 돌아와서(!)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납득이 되지 않는 책이었다. 반쯤 읽고서야 저자가 유체이탈이 어떠한 경로로 이루어지는지, '업보'가 어떤 식으로 쌓이는지, 어째서 후생과 전생에서 사람의 성격이 유지되는지 끝까지 설명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그 리스트매니아의 주인은 판타지와 로맨스를 뒤섞어 목록을 꾸몄던 것이다!

로맨스라는 장르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판타지의 소재로 로맨틱한 주제를 풀어나가는 소설이 있다고 할 때, 독자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어야 그 이야기를 즐겁게 읽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위 소설의 경우, 나는 주인공의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갔을 때 실망하기 시작했고 끝까지 설명이 안 나왔을 때는 기대와 너무 다른 책의 내용에 낙심, 돈과 시간이 아까워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기대했다면 만족했을 터인데 말이다.

자, 그럼 이 책을 보자. 로맨스와 판타지를 결합했단다. 양 장르에서 모인 여섯 저자의 면면도 만만찮다. 로맨스 쪽은 잘 모르겠지만 아사로(Catherine Asaro), 뷔졸드, 로버슨은 로맨틱한 판타지/과학소설로 꽤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안정적인 작가들이다. 표지를 살펴보니 제목이 샤랄라 폰트이긴 해도 번쩍이는 금박은 아니고 애매한 구름으로부터는 양 장르 독자를 끌어들이려는 마케팅의 포-스가 느껴진다. 조금 수상해도 이름값을 믿어볼 만은 하다. 샀다. 읽었다.

......로맨스 독자가 아니라면 사지마셍 ㅠ_ㅠ)......

로맨스를 바란다면 만족하리라. 하지만 판타지나 과학소설다움을 기대할 책은 아니다. 뷔졸드와 아사로는 각각 자신의 대표적인 판타지/과학소설 시리즈의 배경을 그대로 썼으나 여기 실린 단편은 그 설정을 몰라도 읽는 데 별 지장이 없는 ㅡ 다른 책에 거듭 등장하는 인물을 발견하는 잔재미는 있을지언정 ㅡ 로맨스이다. 나머지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약간의 마법, 운명, 과학으로 양념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 점에서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이 책에 대한 평이 좋지 못한 이유는 로맨스로서 그 가치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판타지 독자를 겨냥한 책이 전혀 아니면서 그런 척 하여 나처럼 속아넘어간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2004년 5월 16일 일요일

Robert Charles Wilson, Bios


크로놀리스의 저자인 캐나다 작가 로버트 찰스 윌슨(Robert Charles Wilson)의 작품이다. 근작은 아니고, 크로놀리스 이전에(1999) 쓰여진 200페이지 정도의 비교적 짧은 소설이다.

지구보다 훨씬 오래되었고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이시스(Isis)라는 행성에서 일단의 과학자들이 Work Trust라는 그룹(권력 비슷한)을 위해 그 행성을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조사를 수행한다. 그 곳을 우주 탐사의 전진 기지로 만들고자 하는 목적에서다. 이시스의 문제점은, 그 곳의 생물은 물론이고 공기와 물 마저도 인간의 생체에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D & P라는 곳에서는 일단의 클론 여아들에게 다양한 면역 수정(immume mod.)을 하고, 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Zoe Fisher가 이시스를 탐험하기 위해 그곳 기지로 온다. 이런 배경은 꽤 읽고 나서야 대강 파악할 수 있다. 열 페이지도 넘기기 전에 조는 이시스에 도착해 있고, 1/4이 되기 전에 이미 이시스의 기지에선 사람들이 감염되어 줄줄이 죽어나간다.

흥미로운 설정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가장 문제는 역시 분량이다. 같은 이야기를 300페이지 정도만 되게 늘려 썼어도 훨씬 몰입이 쉬웠으리라. 머리와 꼬리가 없이 몸통만 덜렁 있어, 완전한 소설이 아니라 트리올로지의 요약본 같다.
한 해 앞에 쓰여진 Darwinia가 찬사를 받았던 것에 비해 가타부타 평이 거의 없었는데, 그럴 만 하다. 크로놀리스에서 보여준 필력에 비해 같은 사람이 같은 정성으로 쓴 것인지 미심쩍을만큼 '아쉽다'. 짧고 굵직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데 비해 속도감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

나쁘지 않으나, 로버트 찰스 윌슨의 팬이 아니라면 굳이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특히 로버트 찰스 윌슨의 책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작가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게 될 위험이 있으니 절대 비추.

2004년 5월 15일 토요일

권교정, 어색해도 괜찮아 1-5


준성인 대상 순정만화잡지 '윙크'에 대해 우선 말해보자. 5월 15일자 윙크에는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못 받아 성격이 비뚤어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가 다섯 편, 그냥 성격이 비뚤어진 주인공이 나오는 만화가 두 편, 인기 아이돌이 등장하는 만화가 한 편 실려 있다.

순정만화의 전형성은 때로 지나치게 비틀어진, 그래서 불편한 비현실성을 동반한다. 너무 자주,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고, 학교는 지긋지긋하기 그지없는 곳이며 틀림없이 같은 열 몇 살 아이에 불과한 조연 여학생은 삼각관계의 한 틀을 맡은 악의 대변자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여1:남2 삼각관계의 남자 조연보다 여2:남1 삼각관계의 여자 조연 쪽이 훨씬 비열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흥미롭다.)

만화 주인공들이 모두 하하호호 웃으며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역할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만화를 보는 사람이나 그리는 사람이나 자기가 담을 넘는 모습을 본 [이왕이면 잘생기고 약간 반항기가 있고 어머니가 안 계신] 나무 위 남학생과 첫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 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그 극단적인 전형성의 비틀어짐이 피곤하고, 그 안에 스며 있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 위험하게 느껴진다.

서두가 길었으니 간단히 줄이면, 나는 이런 삐딱한 비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권교정의 만화를 좋아한다. 교실에 남아 피아노를 연주하던 학생을 우연히 보았는데 알고보니 잘생겨서 전교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애더라는 설정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그러나 권교정은 순정만화의 안전한 설정을 전복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서 비범한 일상성을 드러낸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개 학창 시절은 평범했고, 그래서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시험 결과에 동요하고, 처음 마음에 든 남학생을 보며 가슴 설레고, 친구들과 함께 군것질을 하고, 가끔은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도 해 보고. 그러면서 어른이 되고.

그렇다고 권교정의 만화가 지극히 섬세하고 예민하거나 심각한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낄낄 웃어버리고 말 만큼 재치있는 장면도 여럿 있다. 어떤 감정이든 도들 넘지 않는 소소함을 지킨다. 어서 어른이 되려 발버둥치기보다는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랑과 설레임을 그 나이에 딱 맞게 감싸안고 성장의 길목에 선 주인공들은 따뜻한 공감을 불러온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따뜻한 시선에는 '어색해도 괜찮은 나이'에 대한 막연한 향수가 아니라 언젠가 어른이 될 자신에 대한 기대, 혹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어 있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이 담겨 있다.

2004년 5월 14일 금요일

도착 : 2004년 5월 14일


Garth Nix, Sabriel -> 헉, 뜻밖에 10인치. 너무 크다.;

Michael Swanwick, Michael Swanwick's Field Guide to Mesozoic Megafauna -> 서른 두 페이지짜리가 9달러라니......크흑.

Catherine Asaro (Editor), Irresistible Forces -> 종이가 꾸리.

Ellen Datlow (Editor), Terri Windling (Editor), Swan Sister: Fairy Tales Retold -> 만족.

권교정, 어색해도 괜찮아 1~5 -> 드디어 구입!

2004년 5월 13일 목요일

Barbara Bell, Minimus Pupil's Book : Starting Out in Latin

ISBN: 0521659604, ISBN: 0521755468


미니무스는 브리타니아에 살아요. 작은(mini) 쥐(mus)라서 미니무스죠. 어째서 라틴어를 쓰는데 영국에 사냐고요? 이천 년 전 영국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는 섬이었거든요. 히드리아누스 황제님은 섬 한가운데에 하드리아누스 성벽(Hadrian's Wall)을 짓고, 로마 병사들을 보내 성벽을 지키게 했어요. 성벽 북쪽에는 우리 황제님이 쫒아낸 야만인들이 살아요. 우리집도 그래서 여기까지 왔죠.

우리집에는 집주인인 아저씨, 아줌마, 누나, 그리고 말썽꾸러기 막내 루푸스가 살아요. 물론 노예아저씨들도 있지요. 저랑 고양이 비브리사는 사실 얹혀 사는 거에요. 그래도 저는 작으니까 여기저기 갈 수 있어서 꽤 쓸모가 있어요. 만약 제가 작은 쥐가 아니라면 여러분이 우리집같은 로마인 가정을 속속들이 구경할 수도 없었을 걸요. 게다가 전 똑똑해서 현대 영어까지 할 줄 한다고요. 루푸스가 무슨 사고를 쳤는지 궁금하세요? 우리집 사람들이랑 얘기해보고 싶어요? 제 설명만 잘 들으면 다 할 수 있어요.


에에, 키케로니 카이사르니 하는 어마어마한 아저씨들 글이 읽고 싶은데 언제 저랑 노냐고요? 그게 아니죠! 여러분 시대에야 라틴어는 그냥 책에 쓰인 죽은 언어겠지만, 제게 라틴어는 생활어에요. 그걸 잊어버리면 키케로도 카이사르도 재미가 없어요. 물론 저와 공부한다고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지는 않아요. 커다란 문법표나 두툼한 사전으로 공부해야겠죠.


하지만 문법책이 어려워서 라틴어가 싫어지려고 할 때, 아직 라틴어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지만 어떤 말인지 한 번 들여다 보고 싶을 때, 라틴어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나 슬쩍 확인해 보고 싶을 때, 귀여운 쥐를 만나 실감나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땐 저를 찾아오세요. 우리집에 놀러왔던 제이라는 무지무지 멋진 누나가 그랬어요. 누나는 옥스포드라는 데서 나온 라틴어 책을 여섯 달이나 공부했는데도, 저와 같이 클라우디아네 생일파티에 갈 때까지 라틴어로 '생일 축하해!'라는 말을 할 줄 몰랐다고요. 그런 거, 심심하잖아요.

좀 더 어려운 내용을 함께 공부하고 싶은 분을 위해 Minimus Teacher's Resourse Book도 나와 있어요. 그런데 이 책은 엄청 비싸요. ($70) 제가 워낙 인기있다 보니, 얼마 전엔 'Minimus Secundus Pupil's Book : Moving on in Latin'라는 2권도 나왔어요. 제이누나는 아직 2권에는 놀러 못 와서 제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른대요. 다음에 제이누나랑 만나고 나서 또 여러분이랑 인사할게요. 안녕안녕~

2004년 5월 12일 수요일

Robert Charles Wilson, Darwinia

ISBN: 0812566629


1913년의 어느 날 밤, 유럽이 정체불명의 정글로 바뀌어 버린다. 그 땅에 원래 있던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인류 역사는 우리가 아는 이 세계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유럽을 '다위니아'라 부르며 기적이라 여긴다. 그렇지만 하루아침에 나타난 이 낯설고 위험한 땅에도 그 나름의 역사를 증명하는 화석이 있고, 수없이 많은 생물이 살며 번식을 계속한다.
도대체 다위니아는 무엇일까? 그보다도, 왜 나타났을까?

다위니아가 처음 나타났을 때 10대 소년이었던 길포드(Guilford)는 아내와 아이를 남겨두고 사진사로 다위니아 탐사대에 참가한다. 숲이 깊어질수록 불안하게 흔들리는 사람들.

앞 부분은 묵직하고 침침한 포스트 홀로코스트 모험이야기 같으나 중반부터 방향을 바꾸며 아주 달라진다. 저자(Robert Charles Wilson)가 다위니아 이후 작품인 The Chronoliths에서 보여준 삶에 대한 깊이있는 시각과 Bios에 나타난 낯선 생명과 자연에 대한 생생한 묘사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예상하기 힘들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감동적인 결말을 기대해도 좋은 작품. Tor에서 출간한 페이퍼백을 쉽게 구할 수 있다.

2004년 5월 11일 화요일

Audrey Niffenegger, The Time Treveler's Wife

ISBN: 1931561648


헨리 디 템블(Henry De Tamble)은 시간여행자다. 하지만 그에게는 허리에 차는 시간여행 벨트도, 우주선처럼 시간선을 따라 슈웅 하고 날아가는 타임머신도 없다. 대신 그가 가진 것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과거나 미래로 보내버리는 염색체 이상(Chrono-Displacement Disorder)이다. 언제 어디로 갑자기 사라질지는 본인도 모른다. 그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때나 기억에 깊이 남은 중요한 곳에 좀 더 자주 간다는 것만 경험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골치아픈데, 이에 더해 시간여행을 할 때는 몸만 움직인다. 자기도 모르는 시대에 벌거벗은 채로 뚝 하고 떨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흥미진진한 시간여행이라도 사양하고 싶어진다.

클레어 애브샤이어(Clare Abshire)는 예술가다. 아트스쿨을 졸업하고 집에서 종이작품을 만든다. 어렸을 때는 넓은 집 뒷동산에 올라가 혼자 소풍놀이나 숙제를 하곤 했다. 그러다 여섯 살에, 벌거벗고 바위 뒤에 숨어 있는 서른 여섯 살 아저씨를 처음 만난다.

헨리는 사서다. 도서관에서 일한다. 가끔 이상한 시간에 떨어지는 바람에 신발(이게 항상 가장 문제다!)과 옷을 훔쳐 바바리맨 몰골로 쫒겨다니느라 일을 제대로 못 하거나, 동료들로부터 혹시 변X가 아닌가 하는 말못할 의심을 받는 점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맡은 일 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ㅡ 헨리는 자신의 시간여행이 생물학적 원인에서 비롯된 줄을 모른다 ㅡ 성격은 엉망이다. 미래도 없고 아버지와 사이는 나쁘고 툭하면 두번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교통사고 현장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다 스물 여덟 살에, 띵한 머리를 감싸쥐고 출근한 도서관에서 스무 살 아가씨를 처음 만난다.

자아, 이쯤 되면 제목에 나온 Time Treveler와 Wife가 누구인지는 자명한 일. 이 커플의 연애와 결혼은 시간여행에 맞선 싸움이다. 클레어는 하염없이 기다리고 헨리는 매번 집에 돌아오기 위해 발버둥친다. 때로는 우습고ㅡ결혼식의 스트레스로 헨리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라!ㅡ,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가슴저미게 감동적인 이 두 사람의 삶을 하나로 당겨 엮는 것은 사랑이다.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사랑을 통해 우리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그래. 언제 어디에 있든, 결국 우리가 삶을 움켜쥐게 하는 것은 사랑,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2004년 5월 10일 월요일

Nancy Kress, Beaker's Dozen

ISBN: 031286843X


이왕 낸시 크레스(Nancy Kress)로 시작했으니, 열 세 편이 담긴 단편집 Beaker's Dozen에 대해 좀 더 써 보자.

이 단편집의 첫머리를 여는 중편 Beggars in Spain은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 수상한 명작으로, 이후 장편 삼부작(Beggar Triology)으로 다시 쓰여지기도 했으나 원작 중편 쪽이 훨씬 강렬하고 군더더기 없어 장편보다 중편 쪽을 추천한다.

열 세 편을 모두 소개하면 스포일러 덩어리가 될 것 같으니 대충 생략. 금기된 유전자 조작을 통해 훌륭한 발레리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안 소녀의 고민을 어머니와 딸 사이의 갈등이라는 전통적인 소재와 절묘하게 결합한 가슴저미는 중편 Dancing on Air, 외계인과 지구인 탐사대 사이의 관계를 통해 '낯섬'을 넘어서는 '인간다움'을 탐색하는 네뷸러 수상작 Flowers of Aulit Prison, 자매갈등과 출산문제를 다룬 Margin of Error, 사랑하는 타인을 이해하고 그와 완전히 결합하고픈 욕망을 추리소설처럼 풀어 휴고상 후보에 올랐던 Fault Lines등은 이 단편집을 사지 않더라도 꼭 읽어보길 권한다. 판타지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답게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비튼 Summer Wind나 에덴동산 이야기 Unto the Daughters도 눈여겨 볼 만 하다.

대부분의 작품이 도조와나 하트웰의 Year's Best 시리즈에 실린 적이 있고, e-book판매 사이트 fictionwise.com에 가면 일 달러 내외의 가격으로 한 편씩 따로 살 수도 있어 구하기도 쉬운 편이다.

2004년 5월 9일 일요일

James Morrow

'There are no atheists in foxholes' isn't an argument against atheism- it's an argument against foxholes.

- in 'Towing Jehovah'


[##_1L|XMdaN9gxfC.jpg|width=200 height=142| 사진출처: Strange Horizons_##]
* 종교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풍자 판타지/과학소설을 주로 발표하는 미국 작가. 1947-
* 공식 홈페이지
* 저서 목록

Nancy Kress, Out of All Them Bright Stars



지금까지 읽은 과학소설이래야 한 줌 남짓하지만, 그 중에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꼽으라면 한참이나 망설이게 된다. 마이클 스완윅, 루시우스 셰퍼드, 로버트 찰스 윌슨처럼 한참 활동중인 중진, 토니 다니엘 같은 가능성 있는 신인, 절정기의 토머스 디쉬나 시어도어 스터전, 아서 클라크. 고만고만하게 기억에 남는 '좋은' 작가들 중에 딱히 한 사람만 짚어내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작품,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분명히 말할 수 있으니, 낸시 크레스(Nancy Kress)의 단편 'Out of All Them Bright Stars'(1985 네뷸러 단편부문 수상작)가 바로 그것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고속도로변에 있는 작은 음식점에 외계인이 잠시 들러 가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로, 길이도 겨우 대엇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낸시 크레스는 '최초의 접촉(First contact)'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 앞에서 평범한 사람이 경험하는 희미하고 작은, 하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깨달음을 놀랍도록 깊이있고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런 세심한 감수성은 낸시 크레스표 중단편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강점이다. 어떤 상황, 어떤 시대, 어떤 공간에서나 그의 등장 인물은 살아 움직인다. 장르의 틀을 넘어 현실에 단단히 뿌리박고 서서 독자와 함께 숨쉰다.

최근 황금가지와 시공사의 SF걸작선을 통해 두 편이 번역 출간되었지만(특허권의 침해, 구세주) 낸시 크레스의 진수를 맛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Out of All Them Bright Stars가 실린 단편집 'Trinity and Other Stories'은 이제 구할 수 없지만, 그만큼이나 훌륭한 작품이 다수 실린 'Beaker's Dozen'은 아직 온라인으로 쉽게 살 수 있다.

'이런 글을 읽을 기회를 얻어 정말 다행이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던 몇 안 되는 소설 중 하나라 새 게시판 첫글로 소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