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29일 금요일

Joe Haldeman, Camouflage

ISBN: 0441011616


문득 최신간을 소개하고 싶어져, 올 8월에 출간된 Joe Haldeman의 신작 'Camouflage'에 대해 간단히 써 본다.

2019년 어느 날. 속을 알 수 없는 단단한 외계 물체가 사모아 해저에서 발견된다. 전직 군인과 과학자들로 이루어진 조사팀이 사모아에 자리를 잡고 물질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실험에 들어간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지구에 살았고, 최근 몇백 년 사이에는 인간 행세를 하며 전쟁에도 참전하고(그렇다, 물론 베트남이다) 인간의 감정 비슷한 것도 배운 외계 생명체도 외계 물체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이 외계 생명체처럼 형태를 바꿀 수 있지만 반대로 악의와 폭력성으로 가득 찬 '카멜레온'이라는 다른 외계 생명체도 소식을 듣고, 당연히 사모아로 향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21세기가 되고도 삼 년이나 더 지난 때 쓰여진 것 치고는 정말로 '고전적'이라는 점이다. 1960년에 쓰였다 해도 믿었을 정도다.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책이라고 해도 '아? 그래?' 하고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안타깝게도 그것은 이 책이 시대를 초월하는 걸작이라서가 아니다. 어렸을 때 아시모프를 읽고, 렌즈맨 시리즈를 보던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고전적(이고 식상한) 설정을 역시 고전적인 유머와 필치로 잘 살려냈기 때문이다. 그래, 한 마디로 이 책은 '안전한 모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 게다가 이러쿵 저러쿵 해도 홀드먼은 결국 꽤 솜씨있는 작가 아닌가. 지적인 자극이나 감정적인 부담 없이, 잘 쓰인 옛 책을 읽는다는 기분으로 집어들기엔 안성맞춤이다. (결코 그 이상은 아니다.)

2004년 10월 27일 수요일

Caroline Stevermer, A College of Magics

ISBN: 0765342456

로커스에서 Caroline Stevemer가 얼마 전에 낸 A Collge of Magics 시리즈 둘째 권 'A Scholar of Magics'에 대한, '청소년을 겨냥했지만 19세기 유럽 사회와 인물 군상에 대해 섬세하게 묘사한 어른에게 더 재미있을 마법 판타지' 운운하는 호평을 읽고 구미가 동해, 책 값의 두 배에 가까운 우송료를 내고 첫 권인 이 책을 샀다.

속았다. -_-

세계는 동서남북의 지킴이가 유지하는 마법의 균형 하에 운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몇십년 전, 북쪽 지킴이(the warden of North)가 균형을 유지하는 대신 자기 나름의 선을 추구하려고 균형을 깨뜨리면서, 마법의 균열이 생겨났다. 방치해 두면 점점 넓어져 마침내는 세상을 종말케 할 균열이다. 그러나 북쪽지킴이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에, 동서남 세 곳의 지킴이들은 죽지도 못한 채 얼마 남지 않은 힘으로 간신히 균열이 더 커지지 않도록 버티고 있다.

주인공인 열 여덟 살 고아소녀 Faria는 Galazon의 예비 영주이지만, Galazon을 통치하지도, 부모님이 물려주신 재산에 손을 대지도 못한 채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Galazon을 대신 통치하고 있는 사이나쁘고 성미 고약한 삼촌은 Faria를 상류층 여학생들이 가는 기숙학교 Greenlaw College로 보내버린다. Greenlaw는 마법을 가르치는 곳으로, 여기에서 주인공은 친한 친구, 신분 및 사회관계상 계속 마주칠 수 밖에 없는 고약한 적, 삼촌이 자기 몰래 딸려 보낸 보디가드 등을 만난다.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어느 날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고, 21살 생일만을 기다리던 Faria는 학업도 끝내지 못한 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렇게 보아서는 평범하긴 해도 흠 잡을 데 없는 설정이다. 하지만 이 책은 재미가 없다.

우선 주인공의 나이와 저자가 겨냥한 독자의 연령층이 일치하지 않는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운 다음, 그 주인공에게 열 너댓살 짜리나 할 법한 언행을 지키니 어찌 재미가 있겠는가. 주인공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짜증을 내거나, 주인공의 나이를 생각하면 유치하기 그지없는 대사를 심각하게 읇을 뿐이다. 말 할 때는 열 살이고 옷 입고 키스할 때만 스무 살이다. 키스 다 하고 사랑을 속삭이려면 다시 열 두 살로 돌아간다. 이래서야 주인공을 18~21살로 설정한 보람이 없잖아? 이야기의 진행 속도에도 문제가 있다. 400페이지가 넘는 책의 첫 150페이지 - Faris가 학교를 떠나기 전까지 - 가 이야기 진행상 (전혀 필요 없지는 않아도) 별로 중요하지 않고, 뭘 배우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학교 생활담으로 끈적하게 차 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독자들이 가질 법한, 기숙제 대학과 교양 교육에 대한 환상이라도 충족시켜 주려는 건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책을 읽고 유치하다는 흠을 잡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YA 도서라고 꼭 유치하라는 법은 없다. 어리다고 감정의 절절함이 덜하고 고민의 진지함이 부족하지는 않다. 잘 쓴 동화책, 아니 잘 쓴 모든 책에는 연령을 초월하는 솔직한 안정감이 있다. 일곱 살이 읽는 그림 동화책에서도 가슴 저미는 감동을 느낄 수 있고, 1318 문고를 읽다가도 눈가를 훔칠 수 있다. 그것이 좋은 책이다.

혹시 마무리가 초중반의 부족함을 덮어줄까 싶어 끝까지 읽었다. 능숙하고 깔끔하게 마무리지어 지기는 하나, 어른도 재미있게 읽을 판타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는 전형적인 '오직 10대 중반만을 겨냥한 소설'이라고 평하고 싶다. 주인공이 적에게 "여섯 살 짜리처럼 말하지 좀 마!" 라고 소리치는 부분을 읽으며, "넌 여덟 살 짜리처럼 말 좀 안 할 수 없냐?" 라고 생각했다.

덧: 이 책이 저연령층을 겨냥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저자가 굉장히 한정된 어휘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를 수 있는 상황에서 똑같은 어휘를 반복해서 사용하니 느낌도 살지 않고 글 자체가 지겹다.

2004년 10월 25일 월요일

George R. R. Martin, The Hedge Night

ISBN: 1932796061

Robert Silverberg가 편집한 'Legend'에 실렸던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 중편, 'The Hedge Knight'을 만화화한 책이다. 'Amazing Stories'에서 이 책에 대한 글을 읽고 관심이 생겨 살까 말까 망설이던 차에, 라슈펠님께서 가지고 있으시다기에 얼씨구나 빌렸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를 읽지 않아 잘 모르지만, 이 책만 보아서는 판타지가 아니라 역사소설(historical novel)같다. 장르의 경계란 것이 때로 꽤 애매하긴 하지만.

방랑기사의 성장과 로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덩크와 에그 둘 중 최소한 한 명은 '얼음과 불의 노래' 주요 인물일 것 같군. 프리퀄인데도 기승전결이 깔끔하고 일단 만화다 보니 길지 않아 부담없이 즐겁게 읽었다.

2004년 10월 17일 일요일

Thomas M. Disch

[##_1L|XAh366HP6e.gif|width=198 height=192|출처: 공식 홈페이지 _##]
* 196~70년대 뉴웨이브 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작가. 과학소설, 판타지, 시, 평론 등 다방면에서 장르의 구분을 초월하는 탁월한 작품을 내놓았다. 판타지와 시 쪽에서는 Tom Disch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황금가지 刊 세계환상문학걸작단편선의 '톰 디쉬'가 바로 이 사람이다) 거침없는 비평과 과격한 발언으로 팬덤에서 악명(?)이 높았으나, 최근에는 뉴웨이브 시절보다 훨씬 부드럽고 유연한 - 그러나 덜 날카롭지는 않은 - 작품을 발표, 세월에 따라 다듬어진 거장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1940-
* 공식 홈페이지
* 저서 목록

2004년 10월 13일 수요일

On Spec, Spring 2004

Cover: Martin Springett

캐나다 계간 장르잡지 On Spec 봄호.

"Printed Matter" by Cliff Burns
"View of a Remote Country" by Karen Traviss
"Resurrection Radio" by Patrick Johanneson
"Ribbons. Lightning." by Joanne Merriam
"Jumpstart Heart" by Michael Brockington
"Alternate Therapy for your Computer" by Karl Johanson
"Reunion" by Jack Skillinstead
"Seven Years" by Megan Crewe
"Ruby Bloom" by Todd Bryantson
"Stick House" by Catherine MacLeod

2004년 10월 12일 화요일

데이비드 흄, 기적에 관하여

ISBN 8970134042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면 크게 공감하며 읽을 책. 흄의 종교/신앙관에 대한 개설서를 여러 권 읽은 후에 뒤늦게 집어든 책이라,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었다. '어? 이렇게 짧은 글이었어?'란 느낌. 오히려 함께 실린, 지금껏 말로만 들었던 러더퍼드와 빈스의 반박문이 뜻밖의 수확이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결국 '믿는다/믿지 않는다'를 이미 결정한 상황에서 글을 쓰다 보니 조금씩 구멍이 있기는 마찬가지.

흄의 종교관을 이신론적 유신론으로 보는 시각에도 일견 설득력은 있으나, 나는 흄이 노골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나서지 않았던 것은 18세기라는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흄을 불가지론자로 보아도, 그의 철학이 가지는 일관성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흄의 저작에서 신앙심을 찾아내어 그를 옹호하려는 글에서는 흔히 '불가지론자=극단적 회의론자 =/= 조화/자연주의자 = 흄'이라는 논리적 비약이 보인다. [무신론자도 아니고] 불가지론자를 극단적 회의론자라고 보는 것 자체가 이미 지나치게 종교적인 시각. 어쨌든 요령있게 산 덕분에 교수는 못 했어도 목숨과 명성은 건져(농담이 아니다), 신나게 읽을 글을 많이 남겼으니 다행일 따름이다.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의 철학/사상서는 (대체로) 굉장히 즐겁다. 새로운 지식이 환영받고, 새로운 의견이 고개를 들던 사회 분위기가 생생히 느껴져서 절로 가슴이 뛴다. 자연과학의 발달이 그에 실어낸 힘도 굉장하고. 새 시대가 덜컹덜컹 다가오는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진달까나. 꼭 한번 가 보고 싶다.(갈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 마.;) 물론 그런 여유의 뒤에는 희생이 있었지만, 그건 다른 곳에서 달리 이야기할 부분이고.......

이태하씨의 해제는 '유학 중에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종교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역자 소개를 보고 우려했던 것에 비해 지극히 무난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연기적과 월드컵 4강 진출을 연결지어 말한 건 너무했어. --;

덧: 아참, 어쨌든 흄의 결론은 기적은 신앙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번역 이태하, 책세상,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