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5일 목요일

Julie Anne Peters, Keeping You a Secret

줄리 앤 피터스의 레즈비언 성장소설. [Luna]를 하도 몰입해 읽어, 그 책을 덮자마자 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무료할 때 읽으려고 두 권을 함께 주문했었는데 하룻저녁거리도 안 되는구나.

주인공 홀란드는 학생회장인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으로, 스탠포드대에 입학허가를 받은 남자친구 세스와 사귀고 있다. 고등학생 때 홀란드를 임신하고 집에서 쫓겨난 후 힘들게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었던 어머니는 홀란드의 대입부터 생활까지 모두 간섭하려고 한다.  홀란드가 스스로 결정한 것 중 어머니가 만족한 일은, 허우대 좋고 똑똑하고 홀란드와 함께 학생회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친구 세스 뿐이다.(약국에서 착각하는 바람에 홀란드의 피임약을 어머니가 받아 주는 일이 생기는데, 참견쟁이인 어머니가 그에 대해서 별 말을 않을 정도다.) 어머니의 새 남편인 넬은 '어머니가 처음으로 만난 좋은 남자'이지만, 거기에는 한 방을 써야 하는 페이스라는 고딕매니아 의붓여동생이 딸려 있다.

홀란드의 학교에 센트럴 워싱턴에서 세시라는 여학생이 전학을 온다. 이 아이는 처음부터 무지개와 'IMRU'라는 문구가 쓰인 셔츠를 당당히 입고 나타나, 왜 이 학교에는 LGBTQ 동아리가 없냐며 홀란드에게 동아리 신설 신청에 관해 묻는다. 그저 무던한 성격이던 홀란드는 세시의 신청서를 받아 학교회의에 가져가는데, 그 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다른 사람들의 혐오/거부감/차별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처음부터 눈을 뗄 수 없었던 세시를 진짜 사랑하게 된다. 세스와의 관계가 그저 오랜 우정에 불과했고, 자신에게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체성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Luna]와 [Keeping You a Secret] 두 권에서는 신경질적인(hysterical) 감성이 공통적으로 묻어난다. 그리고 그 신경질적인 반응은 현실에서의 작은 상처들이 차곡차곡 쌓여 굳어졌을 때만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사물함에 페인트로 낙서를 하거나, 건달 남자애들이 레즈비언 여자애에게 떼로 몰려들어 위협하는 것과 같은 노골적이고 물리적인 폭력보다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농담("저 사람 말투 진짜 여자같다. 호모냐?"), 당연하다는 듯이 표현되는 사회적인 고정관념 ("그 나이에 애인이 없다니!"), 아는 사람의 변화("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가 모이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이제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여러가지를 생각나게 하는 책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다면 여러 사람을 '살릴 수 있을' 책이지만 직접 번역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내일은 만화책을 몇 권 사러 가기로 했다.

Julie Anne Peters, Luna

레이건에게는 오빠가 한 명 있다. 아니, 언니다. 레이건의 오빠 리암은 트렌스젠더로, 밤이면 레이건의 방에 와서 레이건의 옷을 입어보고 화장을 하며 몇 시간씩 보낸다. 자기를 루나라고 불라달라고 하며. 레이건은 정신과 맞지 않는 몸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오빠의 비밀을 함께 안고 살아왔다. (실직한 다음부터 작은 회사에 다니는) 아빠는 자꾸 자신이 원하는 성격이 아닌 아들에게 운동을 하라, 연애를 하라며 밀어붙인다. 예전에는 가정주부였던 엄마는 웨딩플래너 일에 바빠 레이건이나 리암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레이건과 리암과 아주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앨리슨은 리암을 좋아하고, 그가 게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지만, 설마 리암이 자기를 소녀라고 생각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낮에는 리암을 연기하고 밤이면 루나로 돌아오던 오빠는 결국 한계점에 도달하고,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현실은 결국 무너져내린다.

아주 섬세하고 현실적이고, 그래서 괴롭지만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이었다.

Sarah Weeks, So B. It

열두 살 하이디는 광장공포증이 있는 이웃 버니와 정신지체인 어머니와 살고 있다. 어머니는 말을 거의 못 하고, 아주 단순한 일밖에 하지 못한다. 버니는 자기 집 앞에서 엉망진창인 꼴로 있는 모녀를 발견, 함께 가족처럼 살면서 하이디를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이디는 우연히 어머니의 카메라를 발견하고, 그 안에 있던 필름을 현상한다. 그 안에는 젊은 시절의 어머니가 어느 요양소 같은 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들어 있다. 버니가 그 사진에 나온 요앙소를 찾아내 연락해 보지만, 그쪽에서는 담당자를 절대 바꿔주지 않고 나중에는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르던 하이디는 결국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버니나 어머니 대신, 어린 몸이지만 직접 그 곳까지 찾아가 자신의 과거를 알아보기로 마음먹는다.

[Olive's Ocean]처럼 어른'도' 독자인 책은 아니고, 행운이 따르는 아이라는 설정처럼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확실하게 중학생 정도를 겨냥한 청소년 성장소설이다 싶었다. 하지만 중고등학생 때 읽었다면 펑펑 울었을 것 같다. 현실은 아무리 단순화해도 여전히 가혹하고, 성장은 아무리 혼자 겪지 않더라도 고통스럽다.

John Hall, Is he, isn't he

단짝친구인 페이지와 앤소니는 둘 다 별로 애인 운이 없다. 페이지는 어째선지 데이트를 별로 하지 않고, 앤소니는 처음 진지하게 사귀었던 애인인 이안이 바람을 피워서 뻥 차버린 직후라 우울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마음에 쏙 드는 미남 전학생 맥스가 등장! 페이지와 앤소니는 먼저 맥스의 마음을 사로잡는 쪽에게 단짝으로서 깨끗하게 양보하자고 약속한다. 하지만 'is he, isn't he'의 문제가 남아 있다. 앤소니는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게이이고 너를 좋아하는데, 나와 사귀겠느냐?"고 물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여자인 페이지가 그 질문을 하는 건 너무 생뚱맞다. 앤소니의 게이더(gayder)에는 아무 것도 잡히지 않고, 페이지와 앤소니는 맥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좌충우돌하는데.....

흥미로운 설정과 귀여운 표지에 이끌려 구입했다. (태터 업글 후, 어째선지 이 게시판에는 그림이 안 올려진다.) 그런데 앞 10페이지를 읽자마자 내 취향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1. 주인공들은 엄청 비싼 뉴욕의 사립 고등학교에 다닌다.
2. 페이지의 어머니는 엄청 유명한 드라마의 주연 탤런트이다.
3. 앤소니의 부모님은 엄청 유명한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이다.
4. 맥스의 아버지는 엄청 유명한 이탈리안 쉐프이다.
5. 주인공들의 친구 쌍둥이는 엄청 부잣집 딸들로, 전속 스타일러스를 두고 매일 차려입고 다닌다.
6. 앤소니는 엄청 명문대에 다니는 형과 팬트하우스에서 살고, 자신의 성정체성에 전혀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돈 많고 잘생겼고 가족과 친구들이 게이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등등.)
7. 이 소설의 고등학생들은 쇼핑과 수다와 연애와 파티밖에 안 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가방 하나도 쉽게 내려놓지 않는다. "프라다 숄더백을 탁자에 휙 내던진"다.
8. 여자는 모두 예쁘고 남자는 모두 역삼각형 몸매에 잘생겼다. (진담이다.)

그냥 꿈꾸는 연애소설으로 읽었다. 재미는 있었지만, 배경이 현대 미국인데, 24세기 화성인 책보다 비현실적이었다. 컨템포러리 픽션이 아니라 판타지 같았다.

Kevin Henks, Olive's Ocean

막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은 소녀 마사는 할머니 댁으로 여름휴가를 떠나기 전날 낯선 여자의 방문을 받는다. 그 여자는 얼마 전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던 같은 반 학생 올리브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우리 딸아이가 네게 주고 싶어 했을 것' 이라며 올리브의 일기장 한 쪽을 주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사라진다. 그 일기에는 올리브의 소원들이 적혀 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 열여덟 살이 되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오두막에서 살고 싶다는 얘기, 그리고 '우리 반에서 제일 착한' 마사와 친구가 되면 좋겠다는 말.

올리브는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마사는 이상한 기분으로, (올리브처럼)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올리브가 보고 싶어했던) 바닷가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간다.

따뜻하고 아름다운 성장소설이었다. 참 훌륭한 책이라고 감탄하며 출판사들에 보낼 소개서를 쓰다가,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역시나랄까, '병 속의 바다'라는 제목으로 이미 나와 있다. 청소년 독자를 위해 쓰여졌고 꼭 그만큼 소박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어른의 감성에까지 닿는 애틋함도 있었다. 추천할만한 책.

미야베 미유키, 대답은 필요 없어

북스피어에서 내고 있는 '미야베 월드' 시리즈의 일환으로, 작가의 단편집이다. 장편을 주로 쓰는 작가의 단편은 단편을 많이 쓰는 작가의 글과 호흡이 다르다는 얘기를 아스님의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무척 동의했다. 추리보다는 심리에 중점을 둔 섬세한 글이었다. (준)콩가루 집안 애기가 많아서 읽으면서 편치는 않았다. 극악한 상황보다, 현실의 부조리함을 짚어내는 '일상적인' 설정이 더 보기 괴롭다.

좌백, 부부만담

이글루스의 백림원에 올라왔던 부부만담을 책으로 만들었다. 이미 읽은 글이 대부분이지만 블로그에서 즐겁게 봤던 터라 감사하는 의미에서 책으로도 마련했다. (선물해준 용진군에게 감사.) 여전히 재미있었지만, 희안하게도 온라인에서 볼때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이모티콘이 인쇄되고 나니 좀 거슬렸다. 이모티콘이라서가 아니라, 글 안에 이미 들어가 있는 감정들을 불필요하게 덧붙여 표현했다는 느낌이랄까......'역전 앞' 이나 '어려서 조실부모' 같은 표현을 봤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현, 관계의 재구성

영화를 통해 친구, 부부, 연인 등 다양한 관계에 대해 말한 책이다. 사실 이런 영화/소설/만화를 다룬 심리학 책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실제로 보지 않은 영화가 여럿 나왔는데도, 책장에서 뽑아 중간부터 대충 넘겨보다가 처음부터 제대로 끝까지 읽었을 정도다. 쓸데없이 무겁거나 너무 가볍지 않으면서도 글맛이 살아있는 좋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