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12일 화요일

데이비드 흄, 기적에 관하여

ISBN 8970134042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면 크게 공감하며 읽을 책. 흄의 종교/신앙관에 대한 개설서를 여러 권 읽은 후에 뒤늦게 집어든 책이라, 특별히 눈에 띄는 부분은 없었다. '어? 이렇게 짧은 글이었어?'란 느낌. 오히려 함께 실린, 지금껏 말로만 들었던 러더퍼드와 빈스의 반박문이 뜻밖의 수확이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결국 '믿는다/믿지 않는다'를 이미 결정한 상황에서 글을 쓰다 보니 조금씩 구멍이 있기는 마찬가지.

흄의 종교관을 이신론적 유신론으로 보는 시각에도 일견 설득력은 있으나, 나는 흄이 노골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나서지 않았던 것은 18세기라는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탓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흄을 불가지론자로 보아도, 그의 철학이 가지는 일관성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흄의 저작에서 신앙심을 찾아내어 그를 옹호하려는 글에서는 흔히 '불가지론자=극단적 회의론자 =/= 조화/자연주의자 = 흄'이라는 논리적 비약이 보인다. [무신론자도 아니고] 불가지론자를 극단적 회의론자라고 보는 것 자체가 이미 지나치게 종교적인 시각. 어쨌든 요령있게 산 덕분에 교수는 못 했어도 목숨과 명성은 건져(농담이 아니다), 신나게 읽을 글을 많이 남겼으니 다행일 따름이다.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의 철학/사상서는 (대체로) 굉장히 즐겁다. 새로운 지식이 환영받고, 새로운 의견이 고개를 들던 사회 분위기가 생생히 느껴져서 절로 가슴이 뛴다. 자연과학의 발달이 그에 실어낸 힘도 굉장하고. 새 시대가 덜컹덜컹 다가오는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진달까나. 꼭 한번 가 보고 싶다.(갈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 마.;) 물론 그런 여유의 뒤에는 희생이 있었지만, 그건 다른 곳에서 달리 이야기할 부분이고.......

이태하씨의 해제는 '유학 중에 기독교에 귀의하면서 종교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역자 소개를 보고 우려했던 것에 비해 지극히 무난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연기적과 월드컵 4강 진출을 연결지어 말한 건 너무했어. --;

덧: 아참, 어쨌든 흄의 결론은 기적은 신앙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번역 이태하, 책세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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