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7일 일요일

Thomas M. Disch, On Wings of Song


드물게, '진짜 재밌어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지.', '대단히 재능있는 작가입니다.', '펑펑 울었다니까.' 따위의 말만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그저 훌륭한 책을 손에 넣는다고 경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감정과 글의 습도가 절묘하게 맞아들어가는 운 좋은 순간, 책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감동적인 글'의 집합을 벗어나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의 범주로 들어간다.

Thomas M. Disch의 1979년작, On Wings of Song은 내게 바로 그런 책 중 한 권이다.
대략 21세기 중반 쯤 되는 미래, 미국은 지극히 보수적인 중서부 농업 지역(Farm Belt)과 자유롭고 타락한 뉴욕 등 대도시 지역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주인공 David는 노래를 금지하고 성욕을 추한 것이라 가르치는 아이오와 주 소도시에서 치과의사 아버지의 외아들로 자란다. 이 세계(혹은 미래)에서, 음악은 영혼의 '비행flying'이라는 특별한 현상을 일으킨다. 부르는 이와 음악이 감응할 때, 노래하는 자의 영혼은 '비행 기계'의 도움을 받아 몸 밖으로 빠져나가 페어리(fairy)가 되는 초월적 경험을 할 수 있다. 뉴욕 같은 곳에서는 합법적으로 이 기계에 앉아 노래를 부를 수 있다지만 데이비드가 사는 아이오와에서는 찬송가 외의 노래는 구경도 못 한다.
그러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아니겠는가. 데이비드는 금지된 것에 대한 호기심을 못 이겨 친구와 몰래 뮤지컬 영화를 한 편 보러 나갔다가 그만 범죄자로 몰려 강제 노역 캠프에서 몇 년을 보내게 된다. 캠프에서 약물과 육체적 학대에 시달리며 그는 노래를 하고 싶다는 꿈을 품고, 다시 학교에 돌아와 재벌가 딸과 사랑에 빠지며 그 꿈을 더욱 키워나간다.

디쉬는 장르의 구획 안에 쉽사리 끼워 넣을 수 없는 이 소설에 대해 '내가 쓴 글 중 가장 자전적이다'고 밝힌 바 있다. 굳이 구분짓자면, 나는 이 책을 시련과 사랑과 배신과 슬픔을 겪으며 어른이 되는 어느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성장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디쉬가 펼쳐 내는 보수적인 미래와 그 속의 사람들이 지닌 등골 오싹한 현실감, 노래로 페어리가 될 수 있다는 환상, 시작되고, 끝나고, 또 다시 시작하는 사랑, 그 사랑들. 디쉬가 말하는, 아니 보여 주는 인생은 더없이 차갑고, 처절하고, 슬프고, 감히 말하건대 아름답다.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워'류의 미감(美感)이 아니다.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야.' 류의 성장이 아니다. 아, 이를 무어라 이름붙일 수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또 읽은 후에 디쉬가 쓴 다른 책을 여럿 읽었다. 나는 '이 사람 보게' 라고 혀를 끌끌 차고, '역시 디쉬'라고 감탄하고, 때로는 '어이쿠야, 아저씨 무리하지 마셈.' 하고 빙긋이 웃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어떤 글을 쓰든, 어떻게 살든, 누군가 진지하게 이 작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는다면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경건히 답하리라. 이 책을 썼다는 것 만으로도 그를 존경한다고. 그가 작가가 되어 준 것에, 이국의 일개 독자가 지닐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와 경의를 표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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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 관련 정보: 새 책은 이제 절판되어 사기 어렵지만, 1985년 Bantam MMPB판, 1988년 Carroll&Graf MMPB판과 2003년 Carroll&Graf TPB판을 헌책 사이트에서 싸게는 2~3달러로 쉽게 구할 수 있다. 윗 표지 그림은 2003년 캐롤앤그라프판.

댓글 3개:

  1. 음, 정말 읽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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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제이님 덕분에 기억에 두고 남을 책을 읽었네요 :)



    워드프레스 트랙백이랑 잘 안맞아서, 처음 것 지워주시면..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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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ethar님의 마음에 남는 책이 되었다니 정말 기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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