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2월 8일 화요일

러셀 로버츠, 보이지 않는 마음

시장자유주의 찬가를 100절까지 들은 기분이다.

주인공인 고등학교 경제교사 샘 고든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자이다. 시장을 찬양하고, 규제를 비판하고, 자본주의를 옹호한다. 그리고 나도 그의 견해에 많은 부분 동의한다. 특히 '너 돈 많잖아. 그러니까 사회[=나]에게도 좀 줘.'식의 땡깡(...)이나 자본가에 대한 초점이 분명하지 않은 비난에 대한 비판에서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사회복지서비스를 경직된 정부가 아니라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 역시, 일견 타당한 바가 있다. 당장 나 자신만 하더라도 처음에는 민간사회복지현장을 염두에 두고 이 길을 선택했고, 지금도 장기적으로는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언젠가는 민간단체에서 일하고 싶어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이 샘 고든의 감동적인 연설은 너무나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불편하고 무섭다. 공장의 안전장치 규제를 풀고 최저임금제를 없애면 정말 시장이 보이지 않는 마음...아니 손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지도 모른다. 국가가 세금으로 공공비용을 징수하지 않는다면, 시민들은 그 돈으로 경직된 규제에 묶인 정부는 할 수 없는 개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훨씬 더 효율적인 단체를 만들어 자유롭게 활동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케인지안이니 클래시컬스쿨이니 하는 구분을 떠나서, 그 단계 앞에 있는 산을 넘을 수가 없다. 고든은 그것이 작은 언덕인 것처럼 말한다. 바우처 제도를 잘 활용하고, 시민사회의 역량을 믿고, 교육에 힘을 쏟으면 다음 세대에게는 더 많은 선택이 주어진단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규제가 없어지자 처음에는 안전장치 없는 공장을 운영하던 기업가들이 언젠가 그것이 더 큰 이윤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안전장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미 다친 사람들은 어디로 가지? 시장복지의 이상에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체를 쌓을 수 있을까? 비효율적인 규제의 부작용과 시장복지 달성을 위한 진통 중 어느 것이 더 큰 피해를 가져올까? 더 큰 피해를 판단할 수 있는 선은 어디쯤일까? 몇 명 쯤일까? 몇 세대일까? 비숙련 노동자를 노동시장에서 몰아내는 최저임금제와 실업수당제를 동시에 실시하는 사회보다, 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균형임금에 모든 노동자를 고용하고 나머지 먹고 사는 일은 시민사회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사회가 정말로 더 바람직할까?

기업은 이윤을 추구할 뿐 사회악이 아니고(물론이다!), 시장은 모두에게 더 큰 만족감을 가져올 수 있다는 부분에는 크게 공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공공규제에 찬성한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복지사회는 보이지 않는 손이 움직이는 시장이 아니라, 시장을 포함한 더 큰 안전망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지만 그 값이 꼭 물질로만 치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 값을 치루지 못할 고객을 밀어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공공정책이라는 큰 틀을 이용해서 모든 사람이 '도덕적 만족감'이라는 풍선을 하나씩 들고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꿈꾼다. 사람들이 이 풍선에 바람을 채우기 위해 물질적/정신적인 투자를 하고 싶어하고, 마음만 먹으면 어디서든 공기펌프를 찾을 수 있는 세상,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올바른 일'이라는 환상을 팔아먹는(...) 시스템 말이다. 그리고 그 과도기적 도구로서 제도와 규제를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쓰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이미 늦었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부족해 일단은 중언부언 해 둔다. 책에 대해 잠깐 덧붙이자면

(1) 읽어볼 만 하다. 특히 자본가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한 현실을 고려할 때, 추천서라 해도 좋을 듯.
(2) 편집이 이상하다. 책 상단에 아무 쓸모 없는 여백을 몇 센티나 두었다.
(3) 번역 자체에는 무리가 없으나 고유명사 교정이 잘 안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조지'가 중간부터 '죠지'로 바뀌었다.
(4) 로맨스 부분은 좀 약하다.; 실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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