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17일 수요일

신석정, 촛불 (범우문고 195)

수필집은 시집이나 소설과 달리 찾기가 쉽지 않다. 얼마 전 열린책들에서 한국 대표 시인 초간본 선집을 냈던데, 수필의 경우 [있을 법도 한데] 이런 시리즈를 본 적이 없다. 한국 대표 단편 전집 - 내가 어렸을 때 본 것은 스무 권인가 서른 권 짜리 세로쓰기 전집이었다 - 의 수필 버전 같은 것도 없다. 처음 부터 단행본이 아니라 잡지나 신문 같은 곳에 주로 실리고, 잡문 혹은 사적 여흥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흩어지는 경우가 태반이요, 글이 제법 남아 있다 해도 '작가' 전집의 일부로 '수필/기행문/서간문' 이런 책 한 권에 들어간다.

그렇다 보니 수필, 특히 30년대에서 70년대 사이의 수필만을 읽고자 하는 사람은 참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일단 원하는 글을 작가 전집 중 한 권만 달랑 사거나, 욕심이 과해 전집을 통채로 사 놓고 몇 년이 지나도록 관심사가 아닌 뒷부분은 래핑도 뜯지 않고 두거나 (ex)근원 김용준 전집의 '조선미술대요'; ), '고등학생을 위한 현대수필' 혹은 '논술에 나오는 우리글' 같은 책을 뒤진다. (ex)요새는 돌베게 출판사에서 나온 '조지훈-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3'을 읽고 있다.) '모던 수필'을 편집한 방민호 님은 서문에서 조선일보 같은 당대 신문이나 '문장' 같은 잡지를 하나 하나 뒤져 좋은 산문을 찾았다 했는데, 보통 독자의 경우 그런 자료에 접근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중에서 좋은 글을 찾아낼 안목도 부족하다. 태학산문선 300번대가 현대 수필이긴 하지만, 아직 두 권 밖에 안 나왔다.

여하튼 나 같은 사람에게 범우문고는 다른 책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산문이 무진장 쌓여 있다는 점에서 가뭄 속의 단비 같은 시리즈다. 해외 소설 쪽은 저작권 문제는 제대로 해결하고 저렇게 쏟아내는 걸까, 신경쓰일 때가 많지만(...) 한국 수필 쪽은 정말이지 사랑스럽다. 게다가 저렴하기까지 하니.

----

책에 대해 쓰자면 :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로 유명한 시인 신석정의 수필 몇 편을 모은 책. 잘 읽히지 않는 글이 몇 있지만, 무릎을 치게 만드는 이런 구절도 있다.

언제나 황혼은 이 마을 서편에 있는 묵은 산장(山將) 밤나무 숲에서 걸어 나온다. 상소산에서 넌지시 내려온 산줄기가 묵은 산장을 병풍처럼 휙 둘러 황개재라는 작은 재가 되고, 나직한 황개재 너머로 푸른 하늘이 가로 길게 눕고, 그 하늘에 능금빛으로 붉은 저녁놀이 삭은 뒤에야 황혼은 겨우 그 재를 넘어서 밤나무 숲을 거쳐 우리 마을을 찾아오게 된다.

'촛불'의 첫 단락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한 걸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고쳐 썼을까? 즉흥적인 심상을 그대로 옮겼을까? 아, 너무 훌륭하잖아. ㅠ_ㅠ 글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할 수 있으려면 대체 글을 얼마나 많이/열심히/잘/꾸준히 써야 하는 걸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