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 17일 월요일

Catherine Asaro ed., Irresistible Forces

ISBN: 0451211111


언젠가 무료한 저녁, 아마존에서 판타지/과학소설 리스트매니아 목록을 넘어다니며 읽을 만한 책을 고른 적이 있다. 당장 읽을 거리가 필요했던 터라 대충 훑어보고 재미있을 것 같으면 fictionwise,com에 가서 e-book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찾다 양쪽 검색에 다 잡히는 책이 한 권 나왔다. 줄거리를 보니 시대를 넘어 어쩌고 저쩌고란다. 시간여행, 좋지. 일단 샀다. 읽었다. 낭패스러웠다. 주인공이 점집에 가서 전생 이야기를 들은 후 최면요법을 통해 유체이탈하여 과거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가더니 샤바샤바해서 업보를 풀고 돌아와서(!) 운명의 상대를 만난다.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를 떠나 납득이 되지 않는 책이었다. 반쯤 읽고서야 저자가 유체이탈이 어떠한 경로로 이루어지는지, '업보'가 어떤 식으로 쌓이는지, 어째서 후생과 전생에서 사람의 성격이 유지되는지 끝까지 설명해 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그 리스트매니아의 주인은 판타지와 로맨스를 뒤섞어 목록을 꾸몄던 것이다!

로맨스라는 장르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판타지의 소재로 로맨틱한 주제를 풀어나가는 소설이 있다고 할 때, 독자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어야 그 이야기를 즐겁게 읽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위 소설의 경우, 나는 주인공의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갔을 때 실망하기 시작했고 끝까지 설명이 안 나왔을 때는 기대와 너무 다른 책의 내용에 낙심, 돈과 시간이 아까워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기대했다면 만족했을 터인데 말이다.

자, 그럼 이 책을 보자. 로맨스와 판타지를 결합했단다. 양 장르에서 모인 여섯 저자의 면면도 만만찮다. 로맨스 쪽은 잘 모르겠지만 아사로(Catherine Asaro), 뷔졸드, 로버슨은 로맨틱한 판타지/과학소설로 꽤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안정적인 작가들이다. 표지를 살펴보니 제목이 샤랄라 폰트이긴 해도 번쩍이는 금박은 아니고 애매한 구름으로부터는 양 장르 독자를 끌어들이려는 마케팅의 포-스가 느껴진다. 조금 수상해도 이름값을 믿어볼 만은 하다. 샀다. 읽었다.

......로맨스 독자가 아니라면 사지마셍 ㅠ_ㅠ)......

로맨스를 바란다면 만족하리라. 하지만 판타지나 과학소설다움을 기대할 책은 아니다. 뷔졸드와 아사로는 각각 자신의 대표적인 판타지/과학소설 시리즈의 배경을 그대로 썼으나 여기 실린 단편은 그 설정을 몰라도 읽는 데 별 지장이 없는 ㅡ 다른 책에 거듭 등장하는 인물을 발견하는 잔재미는 있을지언정 ㅡ 로맨스이다. 나머지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약간의 마법, 운명, 과학으로 양념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고, 그 점에서는 성공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이 책에 대한 평이 좋지 못한 이유는 로맨스로서 그 가치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판타지 독자를 겨냥한 책이 전혀 아니면서 그런 척 하여 나처럼 속아넘어간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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